상처받은 나로 살아가기 - 최진영 장편소설 <이제야 언니에게> 감상

상처받은 나로 살아가기 - 최진영 장편소설 <이제야 언니에게> 감상

2008년 7월 14일 월요일끔찍한오늘을 찢어버리고 싶다. 책의 첫 페이지에는 글이 쓰인 날짜와 단 한 문장이 있었다. 아니, 그것이 글을 쓰려던 것인지, 지우려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단어를 꿰뚫고 지나간 가로선과 단 하나의 문장이 뿜어내는 격한 분노와 고통에, 나는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 소설의 플롯을 대강 알고 있었기에, 그 날짜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첫 페이지를 펼쳐놓고, 책을 계속 읽을까 말까 고민한 시간이 책을 완독할 때 걸린 시간보다 길었다. 이제야 언니에게 저자 최진영 출판 창비 발매 2019.09.23. 최진영의 소설 <이제야 언니에게>는 성범죄 피해 생존자인 ‘이제야’의 이야기다. 지워버리고 싶던 그날, 그 사건 이후 제야에게 가해졌던 2차 피해와 부서진 일상, 분노와 불안, 원망과 자책, 자기혐오 등이 그녀를 휘감는다. 소설은 제야의 일기 형식과 3인칭 시점을 번갈아 사용하며, 성폭행 피해자의 내면과 주변 환경을 입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총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제야의 평범한 유년 시절부터 시작된다. 제야는 날마다 일기를 썼고, 그녀가 글자 속에 가둬둔 일상을 따라 읽어나가며 독자들은 제야 삶의 단편들을 마주하고, 그녀 내면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스무 살이 되면 외국어를 잘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가진 소녀 제야는, 하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느슨한 지금 이대로도 너무 좋았기에 ‘하루하루를 꼭꼭 눌러 살 수 있는 만큼 다 살아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아이였다. 소설은 제야의 성격이나 어린 시절에 대한 특별한 묘사 없이도, 세상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을 통해 밝고 사랑스러운 내면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제야의 일기장 페이지는 자꾸만 2008년 7월 14일로 돌아간다. 또렷하게 기억할 수도, 그렇다고 지워낼 수도 없는 그날로. 제야는 그 사건 이후 한동안 글을 쓰지 못하다가 마침내 다시 일기장을 펼쳤지만, 다시 글을 쓰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끔찍한’이라는 단어 하나조차 감당할 수 없던 제야에게, 감정을 다 담을 수 없는 단어의 한계라는 오히려 위로가 된다는 현실은 삶을 기록해본 사람만이 이해하는 지독한 역설이다. 상처의 기억을 글로 꺼내놓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누군가가 나 대신 설명해주고 공감해주길 바랐던 나로서는 연필을 다시 쥔 제야의 모습이 아프면서도 고마웠다. 표현이 곧 치유이자 저항이 되던 순간이 있다. 소설은 이러한 주제를 전면에 드러내지는 않지만, 나는 제야가 점차 그날 있었던 일과 자신의 감정을 마침내 조금씩 글로 토해내며, 자신을 위한 삶을 위해 한 발짝씩 내딛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철저히 제야의 삶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 소설도 그 때문에 완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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