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애란 소설집, 비행운

어느 휴일, 여느 때처럼 유튜브 속을 유영하다 누군가의 영상에서 얼핏 본 것도 같은 책. 뚜렷한 목적을 위해 방문한 서점이었지만, 이왕 발걸음 한 김에 구경이나 좀 더 해보자는 심산으로 둘러보다 어디서 본 듯한 익숙함에 나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유년 시절에 좋아하던 캐릭터를 오랜만에 마주하기라도 한 듯 멈춰 서서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매입을 결정하려는 금은방 주인처럼 이리저리 살펴보다 기어코 자리를 잡아 책을 펼쳤다. 한 30쪽 읽었나. 딱 한 권만 사서 집으로 돌아가려던 나름 굳건했던 다짐을 모래사장에 우두커니 있는 모래성을 짓밟듯 무너뜨렸다. 본래의 목적이었던 책과 한참을 저울질하다 즉흥적으로, 어쩌면 충동적으로 계산대에 두 권의 책을 올려두었다.이 책은 총 8편의 각기 다른 단편소설을 담아내고 있다. 각 단편의 주인공들은 다양한 나이대와 성별, 상황 속의 인물들로 맥락상 서로 연관성도 없거니와 같은 세대를 공유하고 있는지도 불명확하다. 아주 다른 제각각의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모두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새로운 삶을 동경하며 ‘비행운(飛行雲)’을 꿈꾸지만,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연쇄적 불운, ‘비행운(非幸運)’에 발목이 잡혀있다는 것. 이처럼 ‘비행운’은 소설 속에서 두 가지 의미로 차용된다. ‘비행운(飛行雲)’은 비행기가 높은 고도로 하늘을 날아갈 때 생기는 가늘고 긴 꼬리 모양의 구름을 의미한다. 반면에, ‘비행운(非幸運)’은 한자의 의미 그대로, ‘행운이 없음’을 뜻한다. 이 소설의 작자, 김애란 작가님께선 비행기가 지나간 자리에 머무는 구름, 무언가 있었던 흔적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고 싶은 것, 그것이 소설의 역할이었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이 책의 제목을 ‘비행운(飛行雲)’이라고 지으셨다고 한다. 마치 이 세상의 모든 비극을 한데 모아놓은 것처럼, 각 단편은 가슴이 아려올 정도로 절망적인, 고통의 서사를 묘사한다. 매우 입체적인 묘사에 주변 사람의 이야기인 양 사무칠 듯 아파하다 나까지 아득한 심연 속으로 빠지는 듯한 기분도 들었다. 좋아질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탓에 인물들이 겪는 막막함과 광장 공포 내지 불안은 우주처럼 극적인 효과를 냈다. 실제로 ‘호텔 니약 따’를 볼 땐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한 번 덮고, 숨을 고른 뒤에 다시 책을 펼쳐야 했을 정도로 가슴이 먹먹해졌다. 생전에 폐지를 모아 생계를 유지하고 자신을 키워주셨던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도 계속 폐지를 주우시는 모습에 주인공은 복받칠듯한 설움에 빠진다.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어릴 적 돌아가신 나의 기억 속 할머니와 상상 속 주인공 서윤의 할머니와 불현듯 겹치면서 눈물이 영글었다. 이 단편 속 가장 기억에 남는 구절을 꼽는다면 “힘든 건 불행이 아니라... 행복을 기다리는 게 지겨운 거였어.” [p. 277]이다. 주인공 서윤이 남자친구에게 들은 말인데, 왜인지 모르게 유달리 잔상에 남는다. 이 책의 주제의식 같기도 하다.각 단편의 결구들은 모두 강력한 여운을 안겨준다.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듯 정신이 멍해지기도 했다. “나는 힘주어 콘크리트 조각을 쥐었다. 멀리 보이는 장미 빌라는, 모텔과 교회는, 아파트는 여전히 평화로워 보였고, 나는 이 출산이 성공적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p.81], “결국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크게 울어버리고 말았다. ‘손톱으로 그렇게 눌리면 아팠을 텐데......’ ‘많이 아팠을 텐데......’ 하고. 천장 위 형광등은 여전히 꺼질 듯 말 듯 불안하게 흔들렸다. 아직 상복을 벗지 못한 채 울고 있는 나를, 여름 옷을 주렁주렁 매단 2단 옷걸이가 무심히 그리고 오랫동안 굽어보았다.” [p.44] 이 두 구절 모두 각 단편의 결구들이다. 나름 열린 결말이라 다음 편으로 넘어갈 때마다 '이렇게 끝난다고..?'라며 충격과 함께 부산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하나 더 기억에 남는 구절을 읊어본다면 “그런데 방금 전 그 여중생이 눈썹 근육을 이용해 제 친구들에게 ‘이 여자 좀 봐’ 하는 식의 신호를 보냈다. 딴에는 악의 없이, 보기 드문 광경이니 같이 보잔 뜻이었다. 이윽고 그때까지 창밖만 보던 기옥 씨가 찬찬히 고개를 들어 그 아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책망도 질타도 아닌 투로 한마디 했다. “뭐 그럴 것까지야.”” [p.173] 소설 속 글자들이 내 머릿속에서 상황 속 배경을, 분위기를, 심지어는 공기조차도 묘사해냈다. 간혹 잔인할 정도로 섬세하게 묘사되는 설명과 시적인 표현은 더욱더 소설 속 공포에 가까운 절망 속으로 나를 이끌었다.소설을 읽을 당시 초반에 맴돌았던 작은 희망(어쩌면 비행운(飛行雲)을 일으켜 인물들이 추락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은 기승전결로 가면 갈수록 걷잡을 수 없이 악화일로를 향하는, 절대 꽃길로 향할 수 없는 이야기에 이내 넋두리를 잃고 말았다. 소설에서 느껴지는 진한 우울감에 덮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독서 기간이 매우 늘어지기도 했다. 그만큼 두 편을 연속으로 읽는 데에는 많은 정신적인 수고가 필요했다. 빠져드는 흡입력에 인물들의 절망과 고통을 함께 간접경험하며 “어, 나도 이런 경험 있는데, 이런 생각 했었는데!”라며 파고드는 공감을 자아냈지만, 이내 파멸의 향기에 먹먹해져 순간 박차고 나의 현실로 숨을 헐떡이며 돌아오기 일쑤였다. 어쩌면 ‘우리들’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남아야 한다는 운명적 과제와 맞씨름하며, 보장되지 않은 미래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찾아오는 비행운(非幸運)들 속에서 ‘우리들’은 오늘도 살아간다.특히나 기억에 남는 단편을 꼽는다면, 첫 번째는 ‘물속의 골리앗’이다. 주인공은 자연재해와 인재를 중첩적으로 경험하면서 졸지에 부모를 모두 여의고, 사춘기 어린 나이에 우주의 고아가 되어버리고 만다. 홀로 그 상황을 견뎌야 했기에, 허나 감당키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결핍되어 있었기에 더욱더 안타까움을 느꼈다. 인간들을 속수무책으로 무너뜨리는 자연재해가 가져다주는 압도적인 공포를 느끼며 이렇게나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도 자연의 위압감과 자연보호에 대한 책임감, 자연훼손에 대한 반성까지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두 번째는 ‘서른’이다. 곡진한 어조의 진심 어린 자기반성과 고해성사가 주를 이룬다. 주인공 '강수인'과 그녀의 제자 ‘혜미’의 이야기가 가장 참혹하게 느껴지는 만큼 잔인하게도 우리의 현실과 가장 맞닿아있다고 느껴졌다. 어느 누가 번듯한 대학을 졸업해 열심히 살다 다단계 회사에 들어가고,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한때 나의 제자였던 천진하고 해맑던 어린 여학생을 이용하리라 계획하겠는가. 그녀의 인생은 기대했던 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자꾸만 예상치 못한 함정에 빠졌다. 그 속에서도 주인공은 살아남았지만, 곁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나 하나 살아남기 급급해 비윤리적인 방법을 택하고 말았고, 사랑했던 이들을 불행에 빠뜨리고 말았다. 걷잡을 수 없는 의구심에 빠져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몰라 아파한다. “언니, 앞으로 저는 어떻게 될까요. 마흔의, 환갑의 나는 어떤 얼굴로 살아가게 될지, 어떤 말을 붙잡고 어떤 믿음을 감당하며 살지 모르겠어요." [p.317]우리는 어떤 비행운을 감당하며, 어떤 비행운과 함께, 어떤 비행운을 그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뭐든지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세상의 말에 나의 잘못된 선택들을 애써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나 자신만을 위해 살아가면서 나를 지탱해 주는 것들에게 홀대하지는 않은지. 나의 추한 모습과 악한 행동들을 인정할 줄도 알아야 하며, 받아들이고 견뎌내야만 비로소 다음 장이 가능해진다. 나를 되돌아보는 것은 앞으로 있을 삶에 큰 도움이 될 것이며, 살아남은 ‘나’에 대한 예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