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해진 장편소설, 로기완을 만났다

언제부터인가 버릇이 하나 생겼다. 내 방 책상에선 잡히는 대로, 밖을 나와선 기분에 따라 손에 꼭 쥔 채 책을 읽는다. 짝꿍처럼 책이 있는 자리엔 늘 형형색색의 형광펜이 함께한다. 둘의 조합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풍만해진다. ‘이건 기억하고 싶다’ 싶은 문장이나 공감으로 마음이 동요되는 구절엔 가차 없이 형광펜의 뚜껑을 뽑는다. 초반엔 글자에 형광펜이 새어나갈까 두려워 올곧은 직선으로 예쁘게 긋기 위해 쩔쩔매곤 했다. 그러다 이것이 주객전도란 걸 어느샌가 어렴풋 깨달았던 거 같다. 내 맘에 영 들지 않게 엉망으로 그어지면 덩달아 기분도 불편해지고 이어서 집중력까지 망가지기 일쑤였다. 줄을 긋는 행위는 일종의 메모다. 지하철에서 읽을 땐 아쉬운 대로 사진을 찍는다. 불특정 다수가 만연한 대중교통 안에서 형광펜을 주섬주섬 꺼내 들어 줄을 긋기엔 나도 모르게 눈치가 보인다.형광펜과 함께한 몇 구절을 추리고 추려서 모아보면 이렇다. Previous image Next image 그중 가장 곱씹게 되고 나도 몰래 문장 안에 나를 투영시키던 구절은 이렇다. 진심이란 것에 병적으로 엄격했던 우리는 언어가 책임질 수 있는 영역 역시 가변적이고 생각보다 훨씬 협소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감정적 차원의 진실이란 한순간에 급조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추억을 헌납하며 조금씩 만들어가는 공유된 약속일 것이다. 흘러가는 시간이 있어야 하고, 그 시간이 조심스럽게 준비해 놓은 구체적인 사건들도 있어야 한다. 사랑이란 언어가 그 모든 것을 보듬어준다고는 믿지도 않았고, 이제부터 연연이 되자는 식의 선언은 유치하게 느껴졌다. P. 72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지?솔직하면서도 담백하고 보면 볼수록 담담하고 우직하다.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의 삶은 대체 어떨까?무척 섬세하고 포용력 넓고 이해심 또한 깊으신 분이겠지?평소 내가 무감각하게 걷는 거리도 작가님이 걸으시면 거리의 모든 것에 생동감과 사연이 불어나겠지? 보고 느끼는 모든 감각들에 민감하게 때론 예민하게 받아들이며 그 감각들이 휘발되기 전 휘갈기듯 메모를 남기시느라 막대한 에너지를 소모하시겠지 그리고 그 시선과 가치를 증여하기 위해 유려한 글로 바꿔내는 것에 온 사력을 다하시겠지.감탄과 동시에 여러 생각들이 배어나던 순간이었다.감정과 몰입이 보통 때보다 과하게 작용되는 새벽에 읽어 그런가.도둑놈 심보처럼 이 글솜씨가 몹시 갖고 싶어 존경심과 부러움, 경외감이 한껏 추켜지며, 그녀가 이 경지에 이르기까지 연마한 시간들이 궁금해지기도 했다.소설을 끝까지 다 읽고 책을 덮기도 전에 처음부터 다시 읽고 싶었다. 문장 하나하나를 꼼꼼히 읽고 최대한 스며들기 위해 애지중지 읽었건만, 문득 김작가와 함께 영국행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이후의 김작가의 행보를 더 따라가고 싶은 바람도 맞지만 끝없이 계속해서 이 이야기가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이었다. 소설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은. 워낙에도 과몰입을 잘하는 나지만, 헉 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