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예은 소설집, 트로피컬 나이트

⊹⊹⊹✦ 할로우 키즈 의미심장한 문을 단숨에 의기양양하게 열어젖히기에 충분했던 작품. 1인칭 독백으로 형사님께 사건의 전말을 설명하는 흐름과 전개가 퍽 맘에 들었다. 재이의 시점 혹은 또 다른 목격자의 증언도 포함됐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이제 막 본격적인 이야기의 서막이 펼쳐지려다 맥이 뚝 끊긴 느낌.. 열린 결말에 큰 거부감이 없기에 당황함도 잠시였지만.가운데에 촛불 하나 켜두고 베일에 감춰진 믿든가 말든가는 오로지 내 몫인 무언가를 설명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듣다 타의에 의해 끝을 못 들은 기분이라 물음표를 감출 순 없었지만, 이내 다음 행선지로 아무 미련 없이 발길을 돌릴 수 있을 만큼 이 뒤에는 아직 아주 많은 작품들이 남아있기에 겸허히 다음 페이지로 장을 넘겼다. 모호한 기분을 붙잡기엔 다음에 있을, 또 다음에 있을 이야기가 무척이나 궁금했다는 소리.✦ 고기와 석류인간의 고독과 이기심. 누군가를 위한 이타심은 그것마저 나, 본인의 이기심을 토대로 이루어진 감정임을 다시 한번 음미하듯 넘겼다. 허나 철저히 서로의 편익을 위해 이루어진 관계로만 보기에는 또렷한 애정이 존재했다. 내 곁에서 나보다 오래 버텨주었으면 하는 그녀의 바람에는 애절함을 넘어선 사무치는 비통함까지 느껴졌다. 자신은 끝까지 남편의 임종을 지켰고, 자식은 생사조차 묘연했다. 아무도 모르게 고독사로 조용히 사체로 썩어갈 자신을 생각하면 울분이 터져 나왔다. 그런 말도 있지 않던가. 자식은 그러기 위해 낳는 게 아니냐며. 나의 마지막을 너는, 너희는 꼭 지켜달라고.남편의 마지막은 내가 지켜주었다. 그럼 나는. 나는 누가 지켜주지. 죽음 앞에 인간은 무력하다. 아니, 고독 앞에 인간은 무력하다. 사정없이 무너져 결국 벼랑 끝에서 추악함을 드러내고 마니까. 나는 ‘마침 잘 됐다’라는 말을 싫어한다. 인간의 추악함을 잘 드러내는 말이라 여겨지기 때문인데, 마침-이라는 표현을 쓰기 전까진 그런 의도가 아니었음에도 어라? 하며 입꼬리를 반쯤 치켜올린다. 아주 작고 하찮은 존재에게 건넸던 온정의 손이 무색하게. 넌 처음부터 그러기 위해 나를 찾아온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당위성까지 붙여가면서.외로움은 그래서 무섭다. 애먼 존재에게 정을 붙여가며 삶을 영위하게 하니까. 믿을 구석이 있을 때, 의존할 곳이 있을 때 우리는 살아갈 힘을 얻는다. 석류도 자신의 존재가치를 그렇게 생각할까 무섭다. 넌 과연 어떻게 될까. 너에겐 하필 구원자일 존재가 실은 저런 추악한 내면을 감추고 너에게 편의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알면, 아니 넌 이해나 할까. 일종의 계약 같은 그들의 공생 관계가 나의 마음을 동요시켰다.*┈┈┈┈*┈┈┈┈*┈┈┈┈*┈┈┈┈*┈┈┈┈*┈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석류가 자신을 먹어도 상관없다는 말이었다. 처음 마주한 순간부터 그랬다. 옥주는 아이러니하게도 언제 자신을 해칠지 모르는 석류 덕분에 두려움을, 공포를 덜어낼 수 있었다. 외롭게 혼자 죽음을 맞이하고 이불 속에서 썩어갈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석류를 키움으로써 자신은 혼자 죽지 않을 것이다. 썩지도 않을 것이다. 자신이 죽고, 더 이상 고기를 줄 사람이 없으면 눈앞의 양분인 자신을 붉은 눈의 석류가 먹어치울 것이다. 기왕이면 석류가 아주 깨끗이 자신을 발라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 썩을 살점도 없을 만큼 깨끗이, 오랫동안 배고프지 않게 두고두고 발라 먹었으면 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마 좀 더 나중의 일. 그런 미래를 위해서는 석류가 자신의 곁에서 버텨야만 했다. [ p. 41 ]죽음을 직감하면 갈비뼈 위에 석류를 올려놓을 것이다. 그럼 석류가 먹겠지. 당장 먹지는 않더라도, 허기가 머리를 지배하는 지점이 오면 굶주린 석류는 붉은 눈으로 샅샅이 나를 발라 먹을 것이다. 그래야 했다. 석류의 양분이 되어 이해 불가능한 죽음으로 남을지언정 외롭게 죽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옥주에게 남은 마지막 목표이자, 지금을 지속하게 하는 힘이었다. 그래서 석류가 필요했다. 옥주는 석류를 껴안은 채 속삭였다. “너는 나를 떠나면 안 돼. 내가 주는 것만 먹으렴. 이 집에 너를 들인 건 나니까.” [ p. 53 ]*┈┈┈┈*┈┈┈┈*┈┈┈┈*┈┈┈┈*┈┈┈┈*┈✦ 릴리의 손나처럼 덕후력 뿜뿜인 사람들이 읽으면 환장할 만한 작품.. ⑉・̆・̆⑉이런 허구적인 SF 이야기도 되게 좋아하는데 굳이 찾아 읽을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는단 말이지. 단편 소설집은 이럴 때 참 이롭다. 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같은 궤적을 관통시키니까. 난 사랑 이야기, 즉 로맨스를 가미한 혹은 중점을 둔 소설 특유의 짙은 호소력을 굉장히 좋아한다.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있어 좋으나 사랑은 사람을 바보처럼 무모한 행동을 일삼게 만들기도 하고, 때론 그 사람을 떠올리며 계속해서 살아가게 만들기도 한다. 사랑은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사랑은 사람을 살아가게 한다. 이런 사랑의 복잡성과 그에 파생되는 복잡한 관계성을 참 좋아한다.내가 삶의 주체가 되는 실제 삶에는 단순한 게 최고라며 예찬하지만, 이런 것도 내로남불인가.. 허구의 이야기 속 내가 제3자가 될 수 있다면야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고, 말로는 쉽게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선을 넘나들 때 난 단전에서부터 끌어 오르는 긍정적인 한숨을 뿜어낸다. 바로 이거거든.....